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문단 편집) === 귀환, 포로, [[존 왕|존]]의 반란 === [[3차 십자군]] 원정 도중 메시나에서 체류했을 때 리처드 1세의 동상이몽의 실체가 밝혀지고 정치적으로 수틀리자 즉시 배신한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음모 또한 드러나게 되자 둘의 우호 관계는 단절되었다. 아크레 함락 직후 귀국한 필리프 2세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동생 [[존 왕|존]]을 사주해 음모를 획책하는 통에 리처드는 살라흐 앗 딘과 결국 결판을 내지 못하고 귀환하게 된다. 지중해에서 난항을 거듭하다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제국령에 다다라 순례자로 위장하기도 했다. 아퀼레이아 부근에서 배가 난파하여 매형인 하인리히 사자공의 원조를 받기 위해 극소수의 부하들만 이끌고 비밀리에 유럽 대륙을 횡단했다. 허기와 병에 시달리던 도중 아크레에서 모욕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영지인 빈에서 생포되어 부하들은 고문을 받았고 리처드는 뒤른슈타인 성으로 이송되어 검을 든 병사에게 밤낮으로 감시받는 신세에 처했다. 1192년 12월, 레오폴드 5세의 상위 주군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리처드의 신변에 대한 서신을 보냈고 루앙 대주교 쿠탕스의 월터가 프랑스 왕궁에 심어놓은 첩자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교황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만을 파문하였다. 1193년 2월, 리처드는 하인리히 6세에게 호송되어 트리펠스 성에 수감되었다. 호송되는 도중에 리처드는 로버츠브리지의 대수도원장들을 잠시 만날 수 있었고, 주교들은 리처드의 표정이 밝았으며 황제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고 전했다. 리처드는 처음에 하인리히 6세에게 왕의 권위에 걸맞는 예우를 받았지만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사주를 받은 보베 주교의 선동에 의해 얼마 동안 형편없는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말이나 망아지도 옴짝달싹 못할 무거운 쇳덩이를 몸에 달았다.' 3월 23일, 리처드는 슈파이어에서 열린 신성 로마 제국 법정에 기소되었다. 죄목은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였다. 리처드는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외치고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했다.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시켰고 [[결투 재판]]을 제의하였으나 모두 몸을 사렸다. 또한 법정에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는 여론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도록 유도하였다. 하인리히 6세는 이탈리아 남부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리처드의 보석금으로 십 오만 마르크를 선고하였고, 이는 잉글랜드 연간 소득의 2-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 자리에는 리처드의 오랜 충복이자 십자군 군대를 인도하여 복귀시키는 임무를 맡았던 솔즈베리 주교 허버트 월터가 참석했는데 리처드는 그의 어눌한 화술에 가려진 유능함과 충성심을 꿰뚫어보고 그가 잉글랜드로 귀환한 즉각 모후의 권한으로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게 하였다. 존은 용병 부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섭정위원회에게 복종을 요구하였고 형에 대해 여태 퍼뜨렸던 온갖 흉측한 소문들을 다시 일일이 열거하며 설득했다. 심지어 형이 이미 죽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응이 미온하자 무력 행사를 결정하여 잉글랜드 내전을 벌였다. 그 사이 필리프 2세가[* 팔레스타인을 떠난 뒤부터 리처드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극심한 신경증에 시달려 1년 넘게 루브르 성에만 틀어박혀 이따금 유대인에게 죄를 물어 처형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었다.] 직접 출군하여 노르망디를 침공하고 리처드의 아키텐 봉신들의 충성심을 휩쓸고 있었다. 잉글랜드 대법관 윌리엄 롱챔프가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려가 하인리히 6세와의 협정을 도왔던 덕에 리처드는 독방 감금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트리펠스 성에서 하게나우로 이송되어 이때부터 귀빈에 가까운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수뇌부와 친분을 쌓으며 동맹을 다졌고 하인리히 6세의 진짜 목적이 필리프 2세를 복종시키고 동맹을 맺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또 밝은 모습을 보였다.[* 존의 반란 소식에 대해서 "내 아우는 손톱만큼의 저항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절대 정복하려 들지 않을 놈"이라고 얕보듯이 말하기도 하며 사냥을 즐기기도 했고 감시인들과 레슬링 시합을 하거나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거나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보석금을 모으는 시간은 길었고 1193년 겨울에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다키텐]] 사이의 장녀인 마리 드 프랑스. 리처드의 이부 누나이자 필리프 2세의 이복 누나로, 둘 모두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에게 심정을 표현하는 시를 보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서, title=필리프 2세, version=?)] >어떤 포로도 진심을 말하지 않소 >능숙히, 슬픔에 빠져 있지 않으면. >하지만 위로를 위해 그는 노래하오. >나는 많은 친우가 있으나 그들의 선물은 적소. >그들에게 불명예가 있으리, 나의 보석금 때문에 >두 번의 겨울이 지나도록 포로로 남아 있다면. > >나의 부하들과 봉신들은 잘 알고 있소, >잉글랜드, 노르망디, 푸아투와 가스코뉴인들이여, >나는 그리 가난한 동료가 없다는 것을 >그들을 나는 돈을 탐내어 감옥에 저버리지 않음을. >질책하려 말하는 것이 아니오만 >여전히 나는 포로라네. > >확실히 보고 나는 비로소 깨달았소. >망자와 포로는 친우도 가족도 없음을. >그들이 금과 은을 탐내어 나를 저버렸기 때문이오. >내가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죽으면 >나의 사람들이 질책받을 것이니, >나를 향한 질책이 많으나 그들을 향한 질책은 더 많으리. > >나의 심장이 슬픈 것은 더이상 놀랍지 않소. >나의 주군이 내 영지를 가혹함에 빠뜨렸기 때문이오. >그가 우리의 맹세를 기억한다면 >우리 둘이 함께 하였던, >나는 실로 잘 알고 있네 오래도록 >포로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을. > >앙주인들과 투렌인들은 잘 알고 있소, >부유하고 무사한 이 젊은이들이여,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는 다른 이의 손에서 포로라는 것을. >그들은 나를 많이 사랑했으나,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소. >훌륭한 군대는 더이상 평야에 존재하지 않소 >내가 포로이기 때문이오. > >나의 동료들이여, 그들을 나는 사랑했고 사랑하오, >캉의 동료들이여 페르슈의 동료들이여, >나에게 말하게, 노래하게 그들이 믿지 않음을, >그들을 향한 나의 심장이 거짓과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포로로 남아 있을 동안, 그들이 나와 대적한다면, >그들은 몹시 극악무도하오. > >백작 부인인 누이여, 그대의 고귀한 영지는 >그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보호받을 것이오. >나는 그에게 호소하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포로로 남아 있네. > >나는 샤르트르 백작 부인인 누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오. >루이의 모친 말이오.[* 마지막 연 8연. '샤르트르 백작 부인 = 루이의 모친'은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의 차녀 알릭스 드 프랑스로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의 친여동생이다. 이복/이부 형제들과 매우 친밀했던 언니와 달리, 알릭스는 형제들과 서로 무관심하게 지냈다.] >---- >《어떤 포로도 진심을 말하지 않소[[https://youtu.be/lJEZ4ODUuk4|^^Youtube^^]]》 결국 리처드는 모후에게 신성 로마 제국으로 와주기를 청했다. 모후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아들과 약혼이 결정된 [[제프리 2세]] 딸 엘레오노르와 키프로스 군주 이사키오스의 딸을 데리고, 잉글랜드를 쥐어짜서 모은 십만 마르크를 가져왔다. 모자는 석방일에 교섭을 하였지만 필리프 2세와 존의 뒷공작 때문에 날짜는 뒤로 미루어졌다. 이에 사자공 하인리히를 비롯해 그간 리처드가 동맹을 다졌던 독일 공작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하인리히 6세는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2월 4일, 리처드는 자유를 되찾았다. 필리프 2세는 급히 존에게 서신을 보냈다.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 서신을 받은 즉각 존은 파리로 도주했다. 리처드는 런던으로 입성하여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또 잉글랜드를 쥐어짜서 군자금을 모았고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그 틈에 존이 투항했다. 모후가 나서서 달래자 리처드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사악한 동료들의 꼬임에 넘어간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의 조언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동생을 공개적으로 용서했다.[* 존과 필리프 2세는 한 살 차이다.] 존이 에브뢰로 달려가 프랑스 수비대를 죽이고 에브뢰를 형에게 바치자 필리프 2세는 에브뢰를 불바다로 만들어 보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